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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시계

명품시계탐구(3편)-A. LANGE & Söhne (아 랑게 운트 죄네_ 독일)

짧은 시간이지만 단숨에 최고의 명품시계 세손가락안에 들어가는 눈부신 발전을 보여준 A. Lange & Söhne (= 아돌프 랑에와 아들들)

독일인들의 자존심이며 기계공학의 정수라 할수 있기에 아마 머지않아 명품시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텍필립의 자리를  위협할 것 같다.

                                                                                                                                                              - 내 생각 -

 


                                                                                                                                                          <자료출처 : 위키백과>

                                                                                                                                                           사진출처 : 랑에 홈페이지 발췌

 

 

<초창기>

은 채굴이 지역 경제의 기반이였던 독일 Glashütte 지방은 은이 고갈되어 가자 지역은 침체기로 빠져들게 되며, 작센(Saxon)주 정부는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시계제조산업을 지원하게되며 , 이를 이끌게된 페르디난트 아돌프 랑에(Ferdinand Adolph Lange)는  1845.12.7. 

에르츠산맥(Erzgebirge)에 있는 글라슈테(Glashütte)라는 곳에   A. Lange & Söhne를 설립하게 된다.

당시 작센주의 수도 드레스덴은  '북쪽의 플로렌스'라고 불릴정도로 발전된 도시였고, 드레스덴의 궁정시계제작자들은 명성이 높았다.

아돌프 랑에는 유명한 궁정시계제작자였던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구트케스(Johann Christian Friedrich Gutkaes)의 밑에서 기술을 익혔고

나중에는 그의 딸과 결혼한다.

 

 

 

랑에가 처음 그의 공방을 설립했을때 부터, 그는 높은 품질과 신뢰성을 지닌 시계를 만들고자했다.  그는 시계제작에 있어 미터법을 도입했고

이것은 시계부품을 제작하는데에 필요한 계산을 간편하게 해주었다.

또한 그는 시계의 안정성과 복원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삼분기판(three-quarter plate)을 발명했는데, 이것은 글라슈테에서 만드는 시계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아돌프 랑에는 자신의 공방에서 일할 15명의 젊은 견습생을 현지에서 고용한다.

이들을 전문적인 시계제작자로 키워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는 작센주 정부와 협상을 벌여, 7820탈러의 지원금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자신의 견습생들이 전반적인 제작기술을 익히게 한 이후, 그는 직공들에게 특정분야(스프링, 배럴 등)의 전문가가 되도록 하였다. 몇 년 후,

그 숙련된 직공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맡았던 분야의 개인공방을 열게된다. 덕분에 글라슈테는 독일 시계제작의 중심지가 되었고, 도시의 수준

자체가 올라가게 되었다.

랑에는 18년간 글라슈테 시의 시장을 맡기도 했으며 1875년에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글라슈테시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Adolph Lange 이후>

아돌프 랑에 사후, 그의 두 아들 리하르트(Richard) 랑에와 에밀(Emil) 랑에가 회사를 이어나간다.

특히 큰아들인 리하르트는 아버지의 시계학적 재능을 물려받았으며 새로운 모델을 제작함에 있어 최신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였다.

형제는 랑에 시계의 기계적, 공예적 완성도를 극도로 높였으며, 이때 랑에 시계가 얻은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있다. 형제가 회사를

이끄는 동안 회사는 27개의 특허와 실용신안권을 획득했다.

리하르트 랑에가 얻은 특허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합금 시계스프링"일 것이다. 리하르트는 시계스프링에 쓰이던 합금에 베릴륨을 섞을때 품질이

훨씬 나아진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발견에서 나온 니바록스(Nivarox) 합금 스프링은 현재의 고급시계 제작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러한 뛰어난 명성과 랑에 시계의 특장점들은 세계 경제대공황기에 많은 경쟁사들이 가게문을 닫을 때에도 회사를 지탱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

이었다.

1차대전과 연이은 세계 대공황으로 어두운 시기로 들어서게 된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이 전쟁은 글라슈테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놨다.

기존에 있던 시게 제작자들은 전부 글라슈테를 떠났으며 시계 제작소들은 전부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때 일부 시계 제작자들은 글라슈테로 돌아와

시계 제작소를 재건 하였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글라슈테의 전통적 계승자라고하여 다이얼에 "오리지널 글라슈테"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에밀 랑에의 세 아들인 오토(Otto), 루돌프(Rudolf), 게하르트(Gerhard) 랑에가 회사를 이어가며,축적된 기술력과 상업적 능력을

통해 그 명성을 쌓아나간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2차대전이 발발하였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 연합군들의 폭격으로 인해 랑에의 시계제작소는 완전히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사회주의자들의 공업적 수탈과 독일의 분열로 인해  100년 넘게 시계의 역사를 이어왔던 A. Lange &Söhne는 1948.4.20. 정밀 기계 부품

업체에게 인수되면서  A. Lange & Söhne라는 브랜드는 역사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가업의 부활 >

독일의 통일 이후, 루돌프 랑에의 아들 발터 랑에(Walter lange)가 가업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발터 랑에는 1924년 7월 29일에 태어났다. 그는 2차대전 발발 직전에 시계제작자로서 훈련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여느 젊은이들처럼 그도 징집

되었고,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뒤 랑에 가족의 공방은 공중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전쟁 후 그의 고향은 동독에 편입되었고 그의 가업은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었다.이에 항의하던 그는 나찌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우라늄 광산으로 강제 유배명령이 났고, 그는 그것을 피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발터 랑에는 그의 고향을 잊지 않았으며 통일이 된 이후 그는 즉시 글라슈테로 건너와 Glashütter Uhrenbetrieb GmbH의 재건을 도모하고

자 했지만 브랜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껍데기에 불과했던 Glashütter Uhrenbetrieb GmbH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판단 아래 선조의 브랜드

인 랑에를 부활 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글라슈테 지방에 최초로 회사가 설립된지 정확히 145년되는 날  1990.12.7.에   Lange Uhren GmbH을 설립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랑에 브랜드

의 부활을 알린다.

그의 회사에는 많은 직원들이 들어왔고 그 즉시 발터 랑에는 새로운 시대의 첫 랑에 시계 개발에 착수하여 4년뒤 첫 시계들을 판매한다.

그 시계들은 LANGE 1, SAXONIA, ARKADE, 그리고 투르비용 'Pour le Merite'를 사용한 시계였다.

이 시계들의 성공으로 글라슈테에는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겨났고, 다시 한 번 독일 시계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Glashütter Uhrenbetrieb GmbH는  스와치 그룹에 편입되어 그들의 중고가 세그먼트에 자리를 잡았으며 랑에는 LMH (Les Manufactures

Horologères)를 거쳐 리치몬드에 편입되면서 최고급 시계의 위치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A. Lange & Söhne는 최고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 받고 있으며 시계의 최고 명가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  :  랑에 시계의 특징

아 랑에 운트 죄네 시계는 모든제품에 기계식 자사 무브먼트를 사용한다.  즉, 무브먼트의 기획, 생산, 조립은 모두 회사 내에서 이루어진다.

밸런스 스프링(탈진기에 사용됨) 제작에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며, 아돌프 랑에가 개발한 삼분기판(three-quarter plate)이 사용된다.

무브먼트의 부품은 시계의 앞판(front plate)와 뒷판(back plate)사이에 위치하게 되는데 삼분기판은 크기가 3/4로 줄어든(1/4만큼을 잘라낸)

뒷판을 의미한다. 삼분기판을 사용할 경우, 뒷판의 줄어든 부분에 다른 장치들이 위치할 수 있으므로 시계가 더 얇아질 수 있고, 무브먼트의 부품들

을 지탱하는 기둥들 간의 간격이 더 좁아지므로 견고함이 한층 강화될 뿐만이 아니라 부품이 더러워지는것 역시 어느정도 방지된다고 한다.

무브먼트의 앞판, 뒷판 그리고 브릿지(앞판 위에 고정되어 있는 얇은 쇠조각)를 제작할 때에 많은 시계제작사들은 황동을 사용하지만

아 랑에 운트 죄네는 저먼실버(German Silver)라고 하는 특수합금을 사용한다.

이 합금은 구리, 니켈, 아연으로 이루어지며, 쉽게 부식되지 않는 성질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먼실버의 표면에는 황금색의

녹이 슬게 되는데 그 색이 매우 아름답고 덮혀진 녹이 추가적인 산화를 막아주어 특별한 코팅을 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저먼실버의 경우는 추가적으로 특별한 처리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품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아 랑에 운트 죄네에 사용되는 나사는 200도~300도에서 천천히 가열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260도 정도에는 빨강, 280도에는 보라, 290도 정도

에는 파랑색을 띤다. 그 과정속에서 매우 얇은 자철광 막이 형성되고, 팔랑개비국화와 같은 아름다운 파란색을 띠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