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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흔적/글쓰기

유인촌 특보의 민비발언 관련.....

유인촌 특보의 민비 발언으로 블로그에서도 논쟁이 뜨겁다.

우연히 블로그에 접속했다가 댓을을 달아 보았다.

누군가 또 뒷다리 잡고 늘어지겠지만 할 말은 해야 하겠기에......

http://jsapark.tistory.com/1686



역사가 100% 진실대로 전해지기는 어려우므로 후대의 사람들이 명석한 판단력과 냉철한 분석, 그리고 그 시대의 시대적 배

경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역사를 비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역사상 안방주인 중 가장 천한 민비가 어떻게 외인자객의 칼에 맞아 죽었는지는 여로므로 더 많은 사료와 고증이 필

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조선말 (1894년 정도) 저종시대인지 아니면 그 아들 순종때인지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고 이 땅의 주인인 백성들의 인권을 살려보려고 동학농민군들이 봉기를 했을때

서울에 있는 기득권자(물론 저종 집안과 민비집안, 그리고 세도집안들)는 자기네들의 권세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

군인들을 끌여 들여 낫과 몽둥이로 무장한 백성들을  가트링(Gatling ) 기관총으로 사살해버린 일들을 후세의 백성들은 어디까

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참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4,000명정도(일본군 몇개 중대포함)의 진압군이 10만명 가까운 동학군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로 "기관총"의 위력은 공포였을 것이고,  총알을 연발로 토해내는 그 기관총앞에 쓰려져 죽어가는 농민들의 눈에는 한이 맺혓을 것입니다.

** 진입군과 동학군의 숫자는 자료마다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정확한 고증자료를 참고할 필요가 있음***

고달픈 삶을 조금 좋게하여 아들딸들을 조금이라도 잘살려보려고 무리하지도 않은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했는데도 우리 군사

도 아닌 원수같은 외적들의 기관총을 동원하여 백성을 학살하는가!!라고 원통해하며 숨져갔을 백성을 생각한다면  그 까짓

"황후"냐 "비"냐 호칭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민자영에 대한 호칭은 정답이 없을 듯 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부르는게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황후" 든 "비" 든 "녀+ㄴ"이든.......




*참고사항*

민자영씨(민비)가 죽은 시점은 1895년이고, 어울리지도 않는 황후존칭을 받은 것은 1897년이라고 하네요

그러므로 유인촌 특보가 담장얘기를 하면서 민비가 죽은 이야기를 한것이므로 그 당시는 민자영씨는 명성황후 아니였음.